우리가 꼭 기억해야 독림운동가, 우당 이회영 선생님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정말 모든 것을 다 바치신 분들이 계시죠. 그중에서도
**우당 이회영** 선생님과 그 형제분들의 이야기는 들을 때마다 가슴이 뭉클해져요. 조선 최고의 명문가에서 태어나 어마어마한 부를 누릴 수 있었는데도, 개인의 편안함 대신 나라의 독립을 택하신 분들이니까요. 가진 모든 재산을 독립운동에 쏟아부으신 그 숭고한 희생은 정말 우리 역사에 길이 남을 거예요.

### 대단한 집안의 혁신적인 분
이회영 선생님은 1867년에 지금의 서울에서 태어나셨어요. 신라, 고려, 조선 시대를 거치며 대대로 훌륭한 가문을 이어왔고, 특히 조선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항복 선생님의 후손이시래요. 서울 명동 쪽에 땅도 엄청 많으셨다고 하니, 얼마나 부유한 집안이었는지 짐작이 가시죠? 그런데도 선생님은 신분 차별이 부당하다고 생각하셔서 노비들을 풀어주시는 등 정말 깨어있는 분이셨답니다.
### 독립을 향한 뜨거운 마음
1905년에 을사늑약이 맺어지자, 이회영 선생님은 가만히 계시지 않았어요. 을사오적을 처단하려 하시는 등 적극적으로 항일운동에 나서셨죠. 또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고종 황제의 특사를 보내는 걸 도우시면서 외교적인 노력도 기울이셨어요. 하지만 외교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걸 깨닫고, 직접 독립군을 키우기 위해 머나먼 만주로 떠나기로 결심하셨답니다.
### 만주에서 피운 독립의 꿈, 신흥무관학교
1910년, 이회영 선생님은 여섯 분의 형제와 가족들, 심지어 함께 살던 노비들까지 약 60여 명과 함께 만주로 망명길에 오르셨어요. 그때 처분하신 재산이 지금 돈으로 따지면 약 600억 원, 땅값으로는 무려 2조 원이나 된다고 하니 정말 상상도 할 수 없는 큰 희생이셨죠. 만주에 도착하신 선생님은 **신흥무관학교**를 세우셨어요. 이곳에서 약 3,500명이나 되는 독립군을 길러내며 무장투쟁의 든든한 기반을 만드셨답니다. 1912년에는 학교를 통화현 합니하반으로 옮기셨고, 3.1운동 이후인 1919년에는 신흥무관학교로 이름을 바꾸셨어요. 하지만 그해 흉작으로 학교를 해산하고 다시 국내로 들어와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는 데 힘쓰시기도 했어요.
### 아나키즘으로 더 뜨겁게
이회영 선생님은 단순히 군사적인 독립운동만 하신 게 아니에요. **아나키즘(무정부주의)** 사상에도 깊이 공감하셔서, 1928년에는 **재중국조선무정부공산주의자연맹**을 조직하셨어요. 일본의 중요한 군사시설이나 높은 사람들을 암살하는 계획까지 세우시며 더 과감한 항일투쟁을 이어나가셨죠.
### 안타까운 마지막 길
1932년, 이회영 선생님은 일본 군사시설과 사령관 암살 계획을 품고 중국 다롄으로 가시던 중에 일본 경찰에게 붙잡히셨어요. 여순 감옥에서 정말 모진 고문을 당하시다가 결국 순국하셨답니다. 선생님의 형제분들도 독립운동 중에 병으로 돌아가시거나 굶어 돌아가시는 등 안타까운 최후를 맞으셨고, 후손분들도 어려운 삶을 사셨다고 해요. 여섯 형제분 중에서는 이시영 선생님 한 분만이 살아남아 나중에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내셨습니다.

### 그분들의 정신을 가슴에 새기며
이회영 선생님과 형제분들은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보여주신 분들이세요. 가진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직 조국 독립만을 위해 헌신하신 그분들의 삶은 지금 우리에게도 큰 감동과 울림을 줍니다. 그분들의 희생을 잊지 않고, 독립운동가들의 고귀한 정신을 이어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